Current Date: 2024년 07월 15일

라틴아메리카 이야기

굴뚝없는 최고의 산업 “탱고”

 
 
아르헨티나가 우리에게 낭만과 감성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방인의 사랑과 애수를 담고 있는 탱고 때문일 것이다. 어느 새 라틴댄스와 음악은 우리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있다. 원초적인 몸짓과 강렬하고 화려한 리듬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만은 않다.
 
인간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땅을 파던 소리, 그리고 자연이 들려주는 신비한 소리가 리듬 속에 저장되어 잠자던 우리의 감성을깨운다.

살사, 메렝게, 차차차, 자이브 ....손을 꼽아 헤아려 보면 꾀나 많은 라틴리듬이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탱고는 에로틱한 감성이 우아하게 표현되어 이성이라는 ‘머리’가 짓누르고 있던 우리의 감성을 맥없이 풀어 놓아버린다.

아르헨티나는 탱고 춤과 음악으로 각광 받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탱고교습소와 학원 그리고 탱고 테마호텔과 테마관광 등 탱고를 상품화 하여 세계 각국 관광객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백인 중심사회로 발전한 아르헨티나에서 굴뚝 없는 최고의 산업으로 성장한 탱고는 어쩌면 아르헨티나 사회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를 솔직하게 들려줘야만 하는 역사인지도 모른다.

19세기 아르헨티나는 ‘문명의 백인화’라는 미명하에 원주민과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인종과 문화를 지워 나아갔다. 그 공백은 유럽 백인 이주자에 의해 채워졌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최고의 백인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인종의 백인화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감성을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다. 파리 패션을 즐기고, 유럽 스페인 사람들처럼 말하며, 영국의 부를 향유하고 싶었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탱고는 아프리카 인종의 흔적은 지울수 없는 역사임을 인정하게 했다.

식민시기 원주민은 멸절되어 갔고, 부족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아프리카 땅으로부터 노예가 유입되었다. 18세기 쿠바와 아이티에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팔려왔고 이들에 의해 탱가노(Tangano)춤이 전해졌다.
 
탱고는 탱가노의 몸짓을 저장했다. 그리고 노예들의 고단한 일상을 달래주며 발전한 19세
기 쿠바의 아바네라(Habanera)리듬도 기억했다. 또한 아바네라가 칸돔베(Candombe)와 결합하여 탄생한 강한 리듬과 빠른 템포의 밀롱가(Milonga)도 탱고 속에 머물렀다.
 
차경미 주말 까미니또 거리 밀롱가를 즐기는 사람들.jpg
1870년대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원주민과 흑인 그리고 혼혈 가우초의 후예인 콤빠드리토(Compadrito)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들은 1870년대 말 밀롱가를 바탕으로 탄생한 새로운 춤과 음악을 ‘탱고’라고 불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서 즐기던 밀롱가는 오늘날 탱고의 면모를 갖추며 변화 되어갔다.

빈민가에서 즐기는 현란하고 에로틱한 탱고는 천박한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탱고 리듬에 현혹되어 갔고, 심야에 탱고를 연주하는 소규모 악단은 늘어만 갔다.

1910년경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프랑스인은 이국적인 리듬에 매료되어 파리에서 연주할 수 있는 최고 악단을 초청했다. 탱고음악은 파리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거칠고 에로틱한 춤은 좀 더세련되게 변화하여 보다 고상한 ‘아르헨티나 탱고(Argentine Tango)’로 탄생되었다.

탱고가 파리에서 인기를 얻게 되자 아르헨티나에서 탱고가 사교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탱고가 대중적 인기를 얻기 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고 결국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는 사회적 성공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하층민들이 길이나 광장에서 즐기던 오리예로 탱고 (Tango Orillero)나 칸옌게 탱고 (Tango Canyengue)는 사라지고, 실내에서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추는 살롱탱고(Tango Salon)가 발전하게 되었다. 칸젠게나 오리제로의 거친 스타일과 달리 느린 살롱탱고는 현대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바탕이 되었다.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리듬을 바탕으로 성장한 탱고는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의 등장과 반도네온의 도입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온 가르델은 탱고음악의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그의 영향으로 탱고의 거장 프란시스코 카나로(Francisco Canaro)와 오스발도프레세도 (Osvaldo Presedo)등이 유럽은 물론 라틴아메리카와 북미까지 탱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차경미 가르델의 집.jpg
 가르델의 집
 

주로 춤을 추기 위한 반주로만 연주되던 탱고 음악은 가르델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카나로(Canaro)와 프레세도(Precedo), 훌리오 드카로(Julio de caro) 그리고 카를로스 디 살리(Carlos Di Sarli)와 같은 뮤지션들의 해외 공연으로 이어졌다.
 
차경미 탱고 오케스트라.jpg
1940년대 접어들어 이전 뮤지션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밴드리더가 등장하여 탱고 음악은 감상용으로 발전하였다. 아니발 트로일로(Anibal Troilo)와 푸글리에세(Pugliese)와 같은 연주가들은 탱고를 피아노, 현악 파트와 관악 파트, 그리고 4-6개의 반도네온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로 연주하였다.
 
춤으로서 탱고는 더 많은 시간이 흘러 거장들이 나타났다. 무명의 초기 무용수는 갱들처럼 밀롱가와 클럽에서 춤 대결을 통해 세력을 과시했다. 거친 광야에서 영역을 놓고 때론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워야 했던 남성의 삶이 탱고 리듬 속에 강렬한 몸짓으로 재현되었다.

탱고의 황금기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살롱이나 밀롱가는 춤추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새로운 모습의 경쾌한 스윙과 같은 춤의 출현으로 탱고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차경미 교수2.jpg
 
[2016624일 제7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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