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Date: 2024년 04월 19일

역사속 여성이야기

단 하루 스스로 관기가 되어 낙엽이 된 의인


 

본지는 이번호부터 역사속 여성인물들을 재조명하는 ‘허스토리’를 연재한다. 어떤 이는 알려져 있거나 또 어떤 이는 알려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그녀들의 흔적을 찾아 시대가 외면하고 부각시키지 않았던 업적과 그 이면의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 재조명하여 결코 힘있는 자들만이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흔적과 노력들로 이루어져온 당연한 진리임을 돌아보고자 한다. 절반의 여성이 역사를 세워온 주인공들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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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주논개

운명적인 삶이 그녀를 이끌지 않았다면 평범한 한 여성으로 살다가 이름없이 갔을지도 모를일이지만 사후에 오히려 세세토록 존경과 칭송을 받으며 온 마을 사람들의 자긍심을 드높여주고 있는 한 여성이 있다.

전북 장수 사람들은 장수지역을 ‘논개골’이라고 부를 정도로 의암 주논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심지어 논개를 ‘논개님’으로 존칭한다.


의암 주논개. 이름이 논개이고 호가 의암이며 성이 주씨다. 범상치 않은 의인은 하늘이 내리는 것일까. 특이한 사주를 타고난 논개는 1574년 9월 3일 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났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난 주논개는 여성이 대접받지 못하던 시대였음에도 아버지 주달문은 논개의 사주를 짚어보고 비롯 여자로 태어났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했다.


이름을 논개라고 지은 것은 술시에 낳았다하여 개를 놓은(낳은의 사투리) 것과 같고,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 즉 ‘논개’가 되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옛 어른들이 이쁘고 귀한 자식일수록 신이 탐하여 앗아갈 것을 두려워하여 ‘똥개’니 아무개로 천한 별칭을 붙여 불렀듯이 논개 또한 역신이 시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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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개가 태어난 장계면 주촌마을논개 생가지. 2000년 성역화 사업으로 건립되었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했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논개는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운명적인 삶이 시작됐다. 어쩌면 불운인지도 모른다. 의지할 곳 없는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는데 노름으로 돈을 탕진한 숙부는 이웃마을 김풍헌을 찾아가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논개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재판관은 최경회 현감이었다. 최현감이 자초지종을 캐보니 달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논개 모녀를 무죄방면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두 모녀를 최현감은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지내도록 배려했다. 논개와 최경회현감의 운명적 인연의 시작이다. 이러한 운명적인 인연으로 최현감집 식솔이 된 논개는 잔심부름이 끝나는 대로 틈틈이 김씨 부인이 알려준 충, 효, 열의 뜻을 가슴깊이 새겼다.


숙부에 팔려 오갈 곳 없던 주논개, 최현감과 운명적 만남
임란때 맹활약하다 전사한 최현감 등 의병도와 구국활동
치밀한 전략과 계획으로 관기변장, 왜적장 유인 강물투신


세월이 흘러 어느덧 논개의 나이 17세가 되었고, 1590년 최경회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때 두 사람은 부부의 예를 올렸다. 그 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를 고향 장수로 보냈다. 2년뒤 임진년(1592)에 역사적인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상중인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옛날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들러 의병을 모집했다.


논개도 다시 만났다. 2년만의 해후였지만 구국의 일념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도왔다. 최의병장이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최의병장은 훈련된 500여 정예부대를 골자부대로 이름짓고 무주로 진격한 뒤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었는데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 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데는 최경회가 이끄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성 외곽에서 맹활약했던 게 주효했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그 소식을 접한 논개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한시바삐 진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남복으로 변장하고 진주로 가는 도중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오랜만에 논개를 본 최경회는 한없이 반가웠지만 회포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10만 명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다.


6월 19일 드디어 왜군은 10만 여 대군을 이끌고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성은 아수라장으로 초토화되었다.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진주성 3장사는 성이 함락된데 책임을 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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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지역에는 오랫동안 논개의 정신을 기리고자 지역과 학교에서
연등제와 연극, 민요, 공연, 제례, 논개축제 등을 열어오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가항력적 왜군세력에 온몸으로 맞서 싸우고도 모자라 나랏님을 향해 예를 갖추고 스스로 하직한 구국의병들의 애국충절이 오늘날 나랏님은 커녕 임기를 마치면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고, 임기중엔 공격의 대상이 되고, 나라보다 당론과 정권장악이 우선인 위정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더욱 아쉬운 것은 비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한편 전투가 한창일 때 논개는 성안에서 수발을 열심히 들었지만, 성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병사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면서 전황을 살폈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 병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마침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 관기들을 불러놓고 전승축하연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논개는 이때를 놓칠세라 마음을 다지면서 관기들 틈에 끼여 연회장까지 들어갈 요량으로 관기들이 촉석루에 들어가는 시간과 길목 등을 정확히 알아두었다. 그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로 여름 옷한 벌을 곱게 장만하고 가락지 등 필요한 물건도 구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논개는 관기처럼 곱게 단장하고 시간에 맞춰 길목에 서 있었다. 논개는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갈 때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다가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쪽으로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가면 정체가 탄로날 위험성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어 상대방을 유인해 보자는 계략이었다.


연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에 취한 왜장들이 문득 강가의 바위쪽을 내려다 보았다. 웬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강가의 바위끝에 서서 자기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장들은 한눈에 반하여 금시라도 여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정체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돌연 육척장신의 체격이 장대한 왜장하나가 논개쪽으로 다가가면서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논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면서 왜장을 유인했다.


왜장은 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논개 앞으로 다가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가락지를 낀팔을 벌려 기쁘게 맞이하면서 왜장을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이때 논개가 끌어안고 강물에 투신한 왜장은 힘세고 용맹스럽기로 유명한 맹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당시 논개가 순절한 바위를 후인들이 의암이라 이름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호가 되었다. 구국일념으로 왜적과 맞서싸우다 순국한 지아비를 쫓아 한 명의 적장이라도 처단해 뒤따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까. 논개의 용기와 전략적이리만큼 지혜롭고 치밀한 계획과 보복이 십만 대군을 무찌르는 것보다 통쾌하다.


오늘날 국어교과서에 등장, 번영로 시인의 ‘논개’를 통해 의로운 논개의 정신이 후대에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기심과 권력욕으로 가득찬 세태에 자극을 주는 노래가 되기를...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유순희 기자

[20171117일 제94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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